현대사회와 선의 필요성



현대사회의 급변에 대하여 혁명적(revolutionary)인 변동 또는 폭발(explosion) 변동이라고 표현함에서 볼 수 있듯이 현대사회는 급변하고 있다. 현대산업사회가 폭발적 또는 폭증적 변동이라고 하는 몇가지 사실을 들어보면 기술폭증, 지식폭증, 인구폭증, 도시폭증, 조직폭증을 들 수 있으며 이러한 현대사회를 통제 관리하기 의한 다양한 제도가 혼란스럽게 생겨나 제도적 혼란을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제도적 혼란 속에는 전통적 가치관, 사회관, 윤리 도덕관, 인간관 등의 변동이 포함되어 있으며, 또한 기술 혁신과 함께 급변하는 변동은 지식과 정보에 의한 시대 변화이다.


근래에는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으로 신속한 지식전달과 함께 다양한 컴퓨터 범죄의 증가 등 여러 가지 부작용 또한 적지 않게 일어난다. 우리나라는 인구성장이 둔화되는 상태에 들어와 있지만 세계적으로 볼 때는 놀라운 인구 성장속에 있다. 여기에 따른 긍정적인 면도 물론 있지만 반면에 민족주의와 종교에 의한 전쟁, 또 기아의 문제 등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한편 세계대전 이후 동서냉전의 양극대립으로 치달아 온 미·소는 화해와 협력의 관계에 들어섰고 종전의 공산체제는 무너지고 이념의 벽은 허물어졌다 하나 아직도 보이지 않는 많은 문제들이 쌓여 있다. 보스니아와 체첸사태, 르완다 사태, 또한 오랫동안의 레바논 내정혼란 등도 이러한 문제의 범주에 속한다. 최근 들어 우리사회에 있어서도 IMF체제의 위기를 통하여 잘 알고 있듯이 미국 중심의 새로운 경제질서는 미국과 유럽, 미국과 중동, 미국과 아시아 간의 분쟁의 소지를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다.


환경문제에 있어서도 산업화의 발전과 함께 지구 온난화를 가져온 각종 공해물질이 범람하고 있으며 심지어 식품과 의약품에 이르기까지 인체에 해로운 물질들이 사용된 채 우리의 식탁에 오르기도 한다. 우리가 무심코 버리는 쓰레기 하나 비눗물 한 방울이 모여 환경파괴를 가져와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기가 되어 되돌아오고있다.

이러한 현대사회를 스위스 바젤대학 H.Ott교수는 전 지구촌시대, 과학문명의 시대, 새로운 종교가 필요한 시대로 분류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새로운 종교가 필요함에 대하여 그는 기성종교는 크게 반성해야 하며 종교간 대화를 해야 하고, 또한 과학문명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열린 종교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러한 현대사회에 대하여 미국의 갤브레이스 교수는 그의 저서『불확실성의 시대』 에서 특히 다국적기업, 제3세계, 거대도시, 핵문제, 빈곤문제 등에 대하여 통찰력 있는 분석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공업화 과정상의 문제, 고도 산업사회의 대량 생산체제에 따른 역기능 문제, 과학기술 발전의 효용과 함께 오는 문제점으로 인한 인간상실 문제, 도덕의 타락과 反이성적 문제, 퇴폐문화의 문제등을 들 수도 있고 아직도 남아있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문제 등으로 집약해 볼 수 도 있다. 현대문명은 위대한 인간의 승리임과 동시에 이와 같은 인간소의현상 위기현상을 동반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조셉에거시 교수는 그의 저서 『현대문명의 위기와 기술철학』 에서 명상철학과 기술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즉 진정한 행위는 명상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근래 러시아에서도 유물론 사회주의에 대한 회의가 휩쓴 후 모스크바대학 사회철학 교수인 몸잔은 역사에서 '의식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으며, 특히 정신에 관한 연구가 러시아 철학자들 사이에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현상이며, 명상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어찌 러시아뿐이겠는가. 무너진 공산권 국가와 함께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도 공통적으로 요청되는 문제인 것이다.


'실존은 참여를 통해 완성된다'고 외친 불란서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물질세계를 인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인정하면서도 그 중심에는 '인간'을 두었으며 자유를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원리로 보았다. 과연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무엇일까?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논문 『현대문명의 위기』 에서 정치적 위기, 경제적 위기, 정신적 위기를 지적하고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는 길은 오직 중도를 발견하는데 있음을 지적하고 이의 해결을 위한 종교적 과제를 가장 중요하게 보았다.



근래에 F.카프라 등 신과학자들은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의 만남을 제시하고 자신들이 직접 동양 철학에서 제시한 궁극적 경지를 체험하고자 참선을 행하고 있다.

근래에 서양인들이 선에 관한 관심이 폭증하고 있는데, 서양인들이 특히 선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이유를 몇가지로 정리해 보자면,


첫째, 서양철학에서 제시했던 이분법적 세계관에 대한 반성과 해답을 선에서 찾을 수 있다.

둘째, 산업사회와 物神주의에 의한 인간소외 현상을 극복하고 진정한 인간회복을 선을 통하여 이룰 수 있다.

셋째, 진정한 인간의 자유를 선을 통하여 체득할 수 있다.

넷째, 선은 인본주의적이머 마음의 문화며 철학이다. 즉 먼저 자신안에서 불성을 찾게 하고 세계가 곧 불성임을 알게 한다. 따라서 세계주의 사상을 찾을 수도 있다.

다섯째, 오랜 기독교 전통의 권태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기독교 문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참 나와 근원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서양인들이 요구하는 선의 필요성은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는 문화일까? 현대사회의 위기상황에서 진정한 자기를 알고. 우주를 알며 참다운 자유를 실천하고 행복과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길을 선에서 찾을 수는 없을까? 이미 미국 등 선진국과 폴란드 등 과거 공산권 국가에서까지도 禪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깊으며 도처에서 禪센타를 찾아볼 수 있음에서 우리는 이미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2. 선(禪)이란 무엇인가


선(禪)이란 의미는 생소한 듯 한 용어이지만 알고 보면 정신문화가 꽃핀 시대에는 그 이름은 다를지 모르지만 크게 발전해 온 실천사상이다. 선은 불타(佛陀)시대에 시작되거나 최초로 이루어진 용어가 결코 아니다. 다만 대성시켰다고는 할지 모르나 불타이전에도 육사외도(六師外道)시대나 전통선으로 전해 내려오는 「우파니샤드」 시대 이전인 「베다」 시대나 「브라만」 시대에도 선이 있었음을 찾아볼 수 있으며 그 이전 인도의 상대(上代)였던 「모헨조다로」 시대에까지 소급되어 좌선을 상징하는 무늬의 대리석 조각이 나온 것을 보면 오랜 옛날에도 선사상은 나름대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선은 또한 인도에만 독점했던 사상도 아니다. 중앙아시아의 시나이 반도에서 「주두성자(柱頭聖者)들이 말둑에서 좌선을 하는 등 소위 몽크의 정신문화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또한 중국의 장자(莊子)가 심제좌망(心齊坐忘)을 제창한 것을 보면 중국인들에게 맞는 선법이 이미 계발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맹자(孟子)도 정좌(正坐)를 말한 것을 보면 모두 불교문화 없이 좌선한 내용임을 찾아볼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우리 선조들도 나름대로 선을 수련했던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선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선 간단히 「마음공부」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선이 주는 의미는 그리 단조롭지 않다. 경우에 따라 일심(一心)의 의미를 가졌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깊은 전통속에 젖어 내려온 것은 인도인들이 밝힌 선(禪)사상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인도인들이 선의 의미를 밝힌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선(禪)이란 용어는 범어의 Dhyana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범어중에도 인도의 속어(俗語)였던 Jhyana에서 선이라는 음역(音譯)이 발상된 것으로 전해 내려온다. 따라서 그 음역으로 중국인들은 쉽게 선나(禪那 - Chana)라고 하였다. 선나의 어근(語根), Dhyai의 의미를 찾아보면「사유수(思惟修)」 「공덕취림(功德聚林)」 「기악(棄惡) 」 「침사(沈思)」 「정려(靜廬)」 등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 용어들은 몇몇 특수의미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정혜쌍수(定慧雙修)의 다른 표현이라고 규봉종밀(圭峰宗密)은 그의 저술인 『도서(都序)』 에서 밝힌 바 있다. 여기에서 특히 침사와 정려는 선의 의역(意譯)으로 각각 고역(古譯)과 신역(新譯)으로 구마라집(龜摩羅什)과 현장(玄奬)이 경전 번역에서 자주 써온 말이라고 전해온다. 이렇게 본다면 선의 원천적인 의미는 정혜쌍수로 본 것이다.


선의 또 다른 용어가 발전한 사상이 있다. 그것은 정(定)이라는 용어이다. 불타의 최초설법이라 할 팔정도(八正道)에 보면 최후의 말씀으로 정정(正定 ? Samma Samadhi)을 결론으로 삼고 있다. 이 정정의 의미는 한문 문화권에서는 삼매(三昧)로 음역하였다. 이 삼매의 어원을 찾아보면 심일경주(心一境住 ? citassa ekaggata)의 의미이다. 이것은 곧 한 마음을 집중했을 때를 의미한다. 이 한 마음이 밖으로 나타나 현실에 응용할 때의 선은 곧 정혜쌍수의 선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러나 이 사상이 중국에 들어와서 초기 선종시대(禪宗時代)에는 인도(印度)의 선사상을 대변해 왔다. 그러나 당말(唐末) 송(宋)대에 접어들면서 선사상이 중국화(中國化)하게 된다. 따라서 선의 의미가 다양하게 바꿔지기 시작한 것이다.

선의 의미는 곧 마음의 본래를 의미하는 것으로 무상(無相) 무념(無念) 무주(無住) 등으로 표현하기도 했는가 하면 종래의 전통적인 사상을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한 경지에서 선을 찾으려 하는 이른바 진공(眞空) 중심의 선사상이 있었는가 하면 여기에 대해서 세상 그대로가 선이라고 보는 묘유(妙有) 중심의 선사상이 발전한 것이다.

따라서 선으로 인한 문화는 전통사상을 일단 부정하는 사상이 있었는가 하면 전통사상을 자기화하는 사상이 발전되기도 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원불교 선은 그 같은 토양을 시원으로 발생하게 된다. 원불교 선의 의미는 무엇일까? 원불교 선의 의미는 성불제중에 이르도록 수행 실천하는 길은 선을 바르게 발전시켜 자기화 하는데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선의 의미로는 「마음공부」 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의미가 내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선의 의미는 자기 마음을 자기가 능히 자유롭게 내고 들이며 쓰는 공부이며 원불교의 정산종사(鼎山宗師)는 흔히 우리들의 인사가운데 「식사했느냐」 「잘 잤느냐」 를 인사로 하는데 우리는 「마음공부 잘 했느냐 」로 바꿔야 한다고 하는 법문을 내린 바 있다. 이웃나라인 일본일들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국민전체가 인사말로 「힘내라」 는 말로 인사를 바꿔쓰기 시작하여 이것이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고양된 것을 상기하면서 「마음공부 잘 합시다」 라고 인사말을 했으면 어떨가한다. 정산종사는 열반직전에 「마음공부 잘하여 새 세상의 주인되자」 라고 밝힌 말씀에서 마음공부를 중요한 과제로 삼을 필요가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마음공부의 의미를 크게 요약하면 다음 몇가지 의미로 정리된다.

첫째 무심공부(無心工夫)요,

둘째 일심공부(一心工夫)이며,

셋째 용심공부(用心工夫),

넷째 삼학(三學)을 병진(竝進)하는 공부 등으로 찾아볼 수 있다.


① 무심공부는 우리의 본래에 무심한 진경에 돌아가는 공부이니 곧 자성(自性)의 본래를 찾아 현실의 상대적인 마음을 녹여없애는 공부를 이름이요.

② 일심공부는 모든 생각을 하나로 정리하여 매사에 적응할 때에는 항상 일심으로 온전해지고 일심으로 바른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니 이 마음이 없으면 바른 길을 찾아 준비할 수 없게 된다.

③ 용심공부는 한 생각을 경계에 대응하여 바르고 원만하게 감사심으로 응용하는 공부를 용심공부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바른 용심공부를 하는 것이 곧 원불교에서 가르지는 기본 공부라고 소태산 대종사는 밝힌 바 있으며 세상을 능히 원만하게 수용하는 감사심을 발휘하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 마음 공부의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④ 삼학을 병지하는 공부란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삼학이 반드시 필요한 공부로써 일이 없을 때에는 수양 연구 취사의 공부를 각각 분야별로 연구하는 공부라면 현실 작용할 때에는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는 공부로써 이것은 곧 삼학을 아울러 행하는 공부라고 밝힌 것이다.


따라서 삼학병진하여 넓은 세상에 유익한 마음을 발하여 살고 영원한 세상에 한마음 마음공부로써 잘 살아가는 길을 개척하자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마음공부는 대단히 광범위하면서도 큰 의미를 지닌 것으로 우리가 개척해야 할 바른 선(禪)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선의 방법은 그 동안 선지식들이 개척해 온 방법과 사상을 벗어나지 않으며 실제로 행하는 공부가 중요한 과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이 선공부를 행하는 기초를 익혀 점진적으로 실천하는 길을 밟아 나가 자신이 바르게 변화되고, 이웃과 사회에 유익을 주는 인격을 연마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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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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